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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상식

조합원|2008-12-23|조회 5,132
◎ 노동의 역사
1.「노동의례」의미와 역사는?
「노동의례」란 이름은 96년 12월 27일 노개투 총파업때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공동집회를 하면서 궁여지책으로 타협해 만들어낸 조어다. 이전까지 민주노조운동 진영은「민중의례」란 이름으로, 어용 한국노총을 포함한 모든 사회세력들은「국민의례」를 의전행사로 해왔다.
지금은「민중의례」나 「노동의례」를 별 구분없이 사용하며 그 내용은 민족민주열사들에 대한 묵념과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으로 정형화돼 있다. 반면 국민의례는 국기에 대한 맹세와 애국 제창이다.
노동자들은 왜「애국가」대신 「임을 위한 행진곡」을 왜 부르나?
노동자들은 해방 이후 이 나라가, 이 나라 권력이 그 성격상 애국할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애국심이 없어서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게 아니라 우리나라의 사회성격을 애국할 수 있는 성격으로 변혁시킨 뒤에 애국가를 불러야지 지금은 아니라는 뜻이다. 또 노동자들은 모든 의전행사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세력들과 명확히 구분짓기 위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어떤 노래인가?
이 노래의 무대는 80년 518 광주민중봉기다. 이 노래의 주인공은 광주 518에서 계엄군의 대공세에 맞서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총탄에 숨진 20여명의 사수대 중 한명인 시민군 지도자 윤상원 열사다.
백기완 선생이 이 윤상원 열사를 기리며 80년에 지은 시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전두환 정권의 광기가 기승을 부리던 81년부터 대학가를 중심으로 이 노래가 불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모든 민중의 투쟁에 이 노래가 불려져 오늘에 이른다.

2. 투쟁시 노동자가 매는 빨간 머리띠는 무엇을 의미하며 왜 매는지?
노동자가 매는 빨간 머리띠의 유래는 원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냥, 농사 등 노동을 하면서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리는 땀이 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위해 이마에 띠를 둘렀다. 땀을 흘리지 않은 자본가는 머리띠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럼으로 머리띠는 노동자만 맨다.
왜「빨간색」머리띠인가?
신흥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이 연합해 봉건영주나 국왕의 중세봉건 권력에 맞서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을 일으켰으나 그 성과를 자본가계급이 독세하자 노동자들은 자본가와 다른 독자적인 사회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1840년 마르크스, 엥겔스를 중심으로 영국에서 제1인터내셔널(공산주의자들의 국제조직)이 탄생했다. 물론 제1인터내셔널은 노동자가 주인인 세상을 갈망하는 조직이었다. 제1인터내셔널은 각 공장의 노동자를 조직하기 시작했고, 이 때부터 깃발을 앞세운 대중시위
(주로 도심에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총을 든 군대와 총격전)를 벌였다.
이 때 사용한 제1인터내셔널의 깃발이 아무 표시도 없는 붉은 색이었다.
노동자들은 바리케이트 전투중에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기 위한 표식으로 붉은 깃발을 내걸었다.
당시 노동자들은 붉은 기를 들고「인터내셔널 黨歌(시실리안이란 비디오영화에 나옴 - 하늬영상 조성봉감독 소장 - 깨어라 노동자의 군대/굴레를 벗어던져라...)」「적기(赤旗)」등의 노래를 불렀다.「적기(赤旗)」라는 노래는 폴란드 민요에 가사를 붙여 불렀는데 우리나라에도 80년 말에 전해졌다. 민중가요 중「바리케이트」라는 노래(바리케이트/넘어 저 넘어/마침내 노동해방...)가 그것이다.
일제하 독립군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 중에도「적기가(赤旗歌)」라는 노래가 있다. 따라서 노동자의 붉은 머리띠는 노동하는 세력들을 표현하는 고유한 상징이다.

3. 구호제창시 손을 올리는 동작은?
손다박을 편채 손을 내뻗는 경우와 주먹을 쥔채 내뻗는 경우가 있지만 노동자들은 집회때마다 손을 뻗어 자신들의 요구를 표현한다.
웅변하는 연사도 강조할 대목에선 말과 함께 반드시 손을 사용한다. 손을 뻗는 동작은 고대사회때부터 목소리로 전달할 수 없는 먼 곳에 있는 사람(즉 성벽을 지어 놓고 사는 국왕이나 봉건영주)들에게 민중들이 자신들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즐겨 사용하던 위력시위의 한 방편이었다.
우리나라에서 80년대에는 민중을 수탈하는 세력(국가권력, 자본가)들의 목을 치는 동작을 나타내기 위해 손바닥을 펴서 내뻗는게 유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율동패의 동작(사회보험 율동패 못짓)에나 남아있고 대부분 주먹을 쥐고 내뻗는 것으로 유행이 바꿨다.
또 언제 유행이 바꿔 손바닥을 편채 내뻗을진 모르지만 가진 것 없는 노동자들이 분노를
하나로 결집시켜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동작이「손짓」임에는 틀림없다.

4. 노동자와 근로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노동자는 임금을 받는 사람을 말한다. 노동자는 자기 노동력만을 팔아서 그 노동력이란 상품의 가치(가격)인 임금을 받는 사람을 말한다.
반면 근로자는 임금을 받는 사람(노동자)과 자영업자, 사용자 등 일하는 사람 모두를 말한다. 따라서 근로자에는 사장도 포함된다. 사장도「노동」은 안하지만 「일」은 하니까. 영어로도 노동과 근로는 labor와 job으로 명확히 구분된다. 우리나라에 노동자는 1300만명이지만,
근로자는 2600만명에 달하는 경제활동인구 전체가 근로자다.

5. 노동해방의 의미는?
노동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다. 이 지긋지긋한 노동에서 해방돼 집에서 잠만 자면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즉 노동해방은 노동하지 않는 것과 다르다. 노동하지 않는 것은 백수건달을 말한다. 노동자가 말하는 노동해방은 자본가가 짜놓은 작업지시에 따라 수동적으로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창의성을 십분 발휘하면서 살맛나게 일하는 걸 말한다.

6. 노동절(5ㆍ1절) 역사는?
노동절의 역사는 19세기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1860년대 미국의 노동자들은 하루 14~17시간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1868년 미합중국 의회는 8시간 노동제를 법으로 재정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그나마도 1876년에는 최고재판소가 위헌판결을 내려 백지화된 상태였다. 8시간노동제는 당시 세계노동자들의 가장 절실한 요구였다. 미국에서는 '8시간 담배'나 '8시간 신발'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8시간 노동일의 노래'가 만들어져 불리워졌다.
1868년 5월 1일 미국노동총동맹(AFL)의 전신인 '합중국캐나다 직능노동조합연맹'은 이날을 기해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하기 위한 대규모 총파업을 단행했다. 이날 시카고를 중심으로 미국 전역의 35만 노동자가 파업에 참가했다. 총파업의 위력에 힘입어 약20만의 노동자는 8시간 노동에 관한 협약을 따내기도 했다. 그러나 파업 3일째 되던날, 시카고의 맥코믹수확기 공장에 4천여명의 경찰이 발포하는 바람에 4명의 노동자가 사살됐다.
다음날인 5월 4일 시카고 '헤이마켓트' 광장에서는 규탄항의 집회가 열렸다. 그러나 집회도중 폭탄이 터졌고 곳곳에는 경찰이 쏜 총에 맞은 노동자들이 꼬구라졌다. 이름하여 '헤이마켓트' 사건이다. 이날 이후 수백명의 노동자가 연이어 체포됐고 스파이스, 파존스 등 4명의 지도자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사형에 처해졌다. 각 사업장에서는 총파업으로 얻어낸 8시간노동제도 대부분 파기시켰다. 노동운동은 일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투쟁은 미국노동총동맹(AFL)으로 전열을 정비하고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쟁취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AFL의 1888년 대회에서는 1890년 5월 1일을 기해 재차 8시간노동제 쟁취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1889년 7월 14일 파리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 창립대회(국제노동자대회)에서도 "90년 5월을 기해 '8시간 노동제' 실현을 위한 각 나라 각 도시에서의 국제적인 시위를 조직한다."는 결의를 채택했다.
이렇게 해서 세계노동자의 날인 '메이데이'가 탄생했다. '메이데이'에는 이렇듯 전 세계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을 상징하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공동요구?공동행동을 통해 단결과 전진을 과시하는 전세계 노동자의 날이며 축제의 날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국노동조합평의회(전평)가 해방전후 대구총파업이나 원산총파업때 5월 1일을 메이데이로 지정해 기념 투쟁을 벌였다. 박정희 정부는 노동자 투쟁을 막기위해 63년 4월 법률로 5월 1일이 아닌 3월 10일을「근로자의 날(노동자의 날이 아닌)」로 지정해 유급휴일로 만들었다.
굳이 3월 10일이 지정된 이유는 57년에 이르러 어용 대한노총(한국노총 전신) 창립일이 3월 10일이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민주노조 세력을 억압하고 어용 대한노총을 체제대로 끌어들이기 위해 이 날을 기념일로 정했다.
전평의 정신을 이어받은 전노협 등 민주노조 진영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줄곧 5월 1일 메이데이에 맞춰 노동절 행사를 열어 정권과 자본에 대항했다. 88년 5월 1일엔 7만명이 넘는 노동자가 서울에 모인적도 있었다.

민주노조진영의 끈질긴 요구로 김영삼정부는 94년 세계 대부분의 노동자가 채택하고 있는 5월 1일로 근로자의 날을 변경하는 법률을 개정했다.
현재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웨덴, 브라질, 아르헨티나, 소련, 중국, 태국 등 대다수 국가들은 5월 1일 메이데이(May Day)를 기념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메이데이 투쟁의 기원이었던 미국과 캐나다의 경우 9월 첫째 월요일을 노동자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이는 미국 노총의 어용성 때문이다. 제 나라 노동자들이 죽음으로 만들어낸 5월 1일 메이데이 조차도 헌신짝처럼 버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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