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후보 홍길동

<<필독>> 아!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노무현 <레디앙 펌>

아!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노무현
그리고 김진숙과 ‘85호 크레인’…"그가 내려올 수 있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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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하지만 소설보다 더 소설적이다. 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벌써 3개월여 전이지만 난 이 글을 쓸 수 없었다. 함부로 쓰기엔 너무도 비극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십여일 전부터는 매일 자리에 앉아 보았지만 단 한 자도 쓸 수 없었다.

그런 중간에도 나는 다시 네 편의 추도시를 쓰고, 읽어야 했다. 쌍용차 무급자인 임무창 씨의 추도시였고, 23년 전에 신흥정밀에서 분신해 간 박영진에 대한 추도시였다. 삼성전자에서 죽어간 반도체 노동자 황유미와 마흔 여섯 분에 대한 추도시였고, 며칠 전 다시 쌍용자동차 노동자 열네 분의 죽음을 추모하는 시였다.

그런데 마지막 네 번째 추도시를 읽어가던 도중 나는 참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어느 순간 나 아닌 누군가가 내 안으로 전이되어 와 내 대신 시를 읽으며 울고 있는 거였다. 난 이상한 전율에 휩싸인 채 그 이를 대신해 울부짖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사람이었다. 비로소 나는 이 이야기를 쓸 수 있으리라 했다.


이 이야기는 1975년 이후 부산에 있는 한 조선소(대한조선공사, 현 한진중공업)를 둘러싸고 벌어진 어떤 사람들의 눈물겨운 이야기다. 아니 그 이전부터 그 조선소에서 일해왔던 사람들 이야기다. 아니 이것은 우리 시대 어떤 난장이들의 서럽디 서러운 현대사에 대한 이야기며, 당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모든 이들의 운명과 관계된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다섯인데, 안타깝게도 넷은 죽고, 한 명만이 살아남았다. 살아 남은 이는 지금 그중 한 명이 올라가 목을 맸던 가파른 크레인 위에 올라 있다. 오늘로 82일째다. 며칠 전 추도시를 읽을 때 내 안에서, 나 대신 함부로 내 글을 뺏어 읽던 이. 김진숙이다.


<문상다니는 시간이 잔업 다음으로 많던 공장>

“아침 조회 시간에 나래비를 쭉 서 있으면 아저씨들 등짝에 하나같이 허연 소금꽃이 피어 있고, 그렇게 서 있는 그들이 소금꽃나무 같곤 했습니다. 그게 참 서러웠습니다. 내 뒤에 서 있는 누군가는 내 등짝에 피어난 소금꽃을 또 그렇게 보고 있었겠지요. 소금꽃을 피워내는 나무들, 황금이 주렁주렁 열리는 나무들, 그러나 그 나무들은 단 한 개의 황금도 차지할 수 없는” - 『소금꽃나무』 중에서


용접 슬라그에 얼굴이 움푹 패이고, 눈알에 용접불똥 맞아도 아프다 소리도 못했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교도소 짬밥보다 못한 냄새나는 깡보리밥에 쥐똥이 섞여나오던 도시락을 주면 공업용수에 말아 먹어야 하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한달 잔업 128시간에 토요일 일요일도 없고 매일 저녁 8시까지 일하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용접불똥 맞아 타들어간 작업복을 테이프로 덕지덕지 부쳐 넝마처럼 기워 입고, 한 겨울에도 찬물로 고양이 세수해가며, 쥐X끼가 버글거리던 생활관에서 쥐X끼들마냥 뒹굴며 살아야 하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언제 폭발할지도 모르는 탱크 안에서 벌레처럼 기어다니며 용접을 하고, 절단을 하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한여름 감전사고로 혈관이 다 터져 죽어도, 비오는 날 족장에서 미끄러져 라면발 같은 뇌수가 산산이 흩어져 죽어도, 바다에 빠져 퉁퉁 불어 죽어도 산재가 뭔지도 몰랐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한 해에도 수십 명의 노동자가 골반압착으로, 두부협착으로, 추락사고로, 감전사고로 죽어가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친 동료들 문병 다니고 죽은 동료들 문상 다니는 시간이 잔업 다음으로 많았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어용노조는 조합비를 횡령해 먹기 위해 멀쩡하게 살아 있는 조합원들의 할머니, 할아버지, 더 나아가 자녀들까지 서류상으로 죽여 상조비를 갈취해 가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이 절망의 조선소에 김진숙은 최초의 여성용접공으로 1982년 스물 한 살 때 입사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집 나와 타이밍을 먹으며 옷감을 깁던 미싱공 생활보다는 나으리라 했다 한다. 떨어질 때는 오른발을 먼저 디뎌야 바퀴 밑에 깔려 죽지 않는다는 122번 화진여객 시내버스 안내양보다는 나으리라 했다 한다. 5년만 바짝 일하면 집도 사고 차도 사서 금의환양하리라 믿기도 했던 공장이었다고 한다.

그런 스물 한살 김진숙의 삶은 그후 어떻게 되었나?  ‘스물 여섯에 해고되고, 대공분실 세 번 끌려갔다 오고, 징역 두 번 갔다 오고, 수배생활 5년하고, 부산 시내 경찰서 다 다녀보고, 청춘이 그렇게 흘러 쉰 두 살’의 머리 희끗한 해고 여성노동자가 되었다.


<빼앗긴 박창수의 죽음>

또 다른 이 소설의 주인공인 박창수는 김진숙과 입사 동기였다. 강원도 태백에서 태어나 태백공고 3학년 실습기간이었던 1982년 2월에 대한조선공사 훈련소(현 한진중공업 직업훈련소) 28기로 입소해 6개월 수료기간을 거쳐 8월에 한진중공업 선각공사부에 입사했다.

세월이 흘러 1986년 어느 날, 박창수는 공장 정문 앞에서 경비들과 어용노조 간부들에게 짓밟히는 한 여성을 보았다. 얼마 전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유인물을 뿌리다 해고당한 김진숙이었다. 박창수 마음 한켠에서도 분노의 압이 높아져 가고 있었다. 자연스레 그들은 ‘민주노조’라는 한 배를 타게 되었다. 밖에서 김진숙 등이 ‘조공노동자신문’을 만들면, 박창수는 이를 몰래 공장으로 들여와 뿌렸다.

1987년 6월 항쟁이 열리던 시기, 이들은 그해 7월 25일 공장에서 처음으로 들고 일어났다. 그간 아무 소리 못하고 받아먹던 ‘교도소 짬밥보다 못한 냄새나는 깡보리밥에 쥐똥이 섞여 나오던 도시락’을 수천의 소금꽃나무들이 일제히 집어 던지던 감동의 순간이었다. 이들이 87년 6월 항쟁을 이어, 진정한 한국사회의 변혁을 이끌었던 87~88노동자대투쟁의 주역들이었다.

박창수는 이런 시대적 소명을 에둘러가지 않았다. 1990년 조합원 93%의 압도적인 지지로 노동조합 위원장으로 당선된 후, 전노협 부산노련 부의장과, 연대를 위한 대기업노조회의(대기업 연대회의) 공동대표로 민주노조 운동의 최선봉에 섰다. 정권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1991년 2월 의정부 다락원 캠프에서 열린 대기업연대회의 수련회장에서 그는 급습한 경찰들에게 짓밟히며 끌려갔다.

그후는 잘 알려진 이야기다. 장안동 대공분실을 거쳐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그는 그해 5월 4일, 의문의 부상을 입고 안양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머리를 서른 여덟 바늘이나 꿰매는 중상이었다. 진짜 사건은 그 다음이다.

5월 6일 새벽, 그는 찾아 온 정보기관 사람들을 따라 나섰다가 병원 뒷마당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박종철의 죽음만큼이나 큰 충격이었다. 당시 경찰은 전면 파업을 선언하고 올라 온 조선소 노동자들과 유가족과 사회단체, 학생들이 지키고 있던 병원 영안실 벽을 해머로 뚫고 들어와 박창수의 시신마저 빼앗아갔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경찰이 발표한 사인은 ‘단순 추락사’였다. 하루가 멀다하고 사람들이 짓밟히고 끌려가는 63일간의 기나긴 투쟁이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해 6월 20일, 하늘이 무너지는 마음으로 김진숙은 그를 가슴에 묻었다. 이렇게 한 명의 친구가 갔다.


<우리 시대의 의인, 김주익>

이 소설의 슬픈 두 번째 주인공은 김주익이다. 박창수가 잡혀가던 의정부 다락원 캠프 회의에도 참석했던 이다. 다행이 그는 당시 구속되지는 않았다.

살아 남은 김주익은 박창수의 못다 한 삶까지 살아내려고 최선을 다했다. 경찰과 사측의 사주로 움직이는 어용들로부터 민주노조를 지켜내기 위해 모든 생을 바쳤다. 1994년 한국 최초의 선상파업인 LNG 선상파업을 주도했다가 구속이 되었지만, 석방 후에도 끈질긴 복직투쟁으로 다시 공장으로 돌아왔다.

다시 수년간의 활동 끝에 그가 민주노조의 깃발을 다시 세우고 위원장이 된 것은 2000년 10월이었다. 그러자 다시 정권과 한진중공업 사측의 파상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노사합의를 일방적으로 깨고 희망퇴직, 명예퇴직, 정리해고를 단행해 왔다. 이 과정에서 600여명이 잘려 나갔다.

김주익은 선택의 폭이 없었다. 당시 21년 동안 근무해서 그가 받는 월급은 기본급 108만원이었다. 각종 공제를 떼고 나면 팔십 몇만 원이었다. 사측은 노조간부 110여명에 대해 19억원에 달하는 손배가압류를 걸었고, 김주익 등 14명을 고소 고발하고, 26명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했다.

회사가 어려워서도 아니었다. 2002년 한진중공업은 1조 6천억 매출에 239억원의 당기 순이익을 내는 알짜기업이었고, 사주는 해마다 50억에서 100억에 이르는 배당을 챙겨가고 있었다.

2003년 6월 11일, 김주익은 최후의 결단을 한다. 폭우가 쏟아지던 새벽, 혼자 100톤짜리 지브 크레인, 35m 상공의 ‘85호 크레인’으로 올라갔다. ‘나의 무덤은 85호 크레인이다. 너희들이 내 목숨을 달라고 하면 기꺼이 바치겠다’라는 절박한 호소였다.

하지만 그 결의를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경찰은 공권력을 수시로 투입했고, 국민의 정부를 넘어 참여정부라는 정권 역시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고 못박았다. 힘을 받은 사측은 김주익이 목숨을 걸고 크레인에 올라 있는 동안에 단 한번의 교섭에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벌써 준엽이와 혜민이와 준하, 그렇게 2남 1녀의 자녀를 가진 중년의 사내가 되어 있었다. 평소 책을 무척이나 좋아해 시간이 조금만 있어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던 이였다. 크레인에서 내려가면 아이들에게 ‘힐리스’ 운동화를 사주겠다던 자상한 아빠였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크레인 위에 있(는) 아빠께. 아빠 그런데 내가 일자리 구해줄 테니까 그 일 그만하면 안돼요. 그래야지 운동회, 학예회 울 아빠도 보잖아요! 다른 애들은 아빠 자랑도 하는데.. 내가 빨리 일자리 찼아줄께요! 파이팅!”이라고 편지를 적어 보냈다.

그는 이렇게 ‘힐리스’ 운동화를 사주겠다는 아이들과의 약속과, 탄압을 멈추지 않으면 죽어서 내려가겠다는 약속 사이에서 두 번째 약속을 택했다. 2003년 10월 17일, 85호 크레인에 오른 지 129일째. 그는 크레인 난간에 목을 맸다.

다음은 그가 마지막 남긴 짧은 유서의 끝 구절이다. “나의 죽음의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나의 주검이 있을 곳은 85호기 크레인입니다. 이 투쟁이 승리할 때까지 나의 무덤은 크레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죽어서라도 투쟁의 광장을 지킬 것이며 조합원의 승리를 지킬 것입니다.” 지키지 않아도 될 약속을, 지키지 말아야 할 약속을 그는 지키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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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장례식, 곽재규>

이 이야기의 세 번째 아픈 주인공은 또 한 명의 늙은 노동자 곽재규다. 죽어서도 크레인 위에서 내려올 수 없었던 김주익을 마침내 평지로 내려오게 한 것은 박창수와 김주익보다 훨씬 먼저 조선소 노동자가 된 곽재규였다.

그는 당시 정리해고 대상에서 제외된 일명 ‘산 자’였다. 그는 그것이 못내 미안해, 내가 주익이를 죽였다며, 김주익의 시신 없는 빈소를 아침마다 찾아와 무릎을 꿇고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누구들처럼 말은 잘하지 못하지만 곽재규는 김진숙과 박창수와 김주익이 앞장서 싸울 때 늘 함께 해주었던 마음 따뜻한 선배였다. 1975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소 노동자가 된 곽재규는 배움에 대한 한이 깊어 산업체 야간 고등학교를 거쳐 야간 전문대학까지 마친 부지런한 노동자였다. 용접이면 용접, 엔진조립이면 조립, 조선소 업무 전체를 꿰뚫고 있었던 유능한 노동자이기도 했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김주익이 목숨을 끊고도 85호 크레인을 내려오지 못한 지 보름째. 곽재규는 85호 크레인 맞은 편 도크 위에서 한많은 생을 내던졌다. 죽어서도 크레인을 못 내려오는 바보 같은 동생에게 ‘승리’를 안겨주기 위한 눈물겨운 투신이었다.

2003년 11월 16일. 마침내 김주익과 곽재규의 합동 장례가 치러졌다. 눈을 뜨고는 볼 수 없고, 이 세상에 다시 있어서는 안될 통곡의 장례식이었다. 35미터 고공 크레인에서 김주익의 시신이 내려왔고, 11미터 지하 도크에 있던 곽재규의 시신이 땅으로 올라왔다.

김주익과 곽재규의 목숨이 제물이 되고서야 정부와 사측은 항복을 했다. 경영이 어려워 정리해고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박창수와 김주익과 곽재규를 기리는 추모공원이 조선소 안에 지어지고, 정리해고 계획은 백지화되고, 노동조합 건물이 5층 복지관으로 번듯하게 지어지고, 30억을 들여 식당이 새로 지어지고, 임금과 성과급이 올라갔다. 수십 년을 싸워도 이루어지지 않던 일들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졌다.

투쟁 머리띠를 찬 채로 술이 거나해져 들어오곤 했다는 곽재규. 칼국수와 수제비를 유난히 좋아했다는 곽재규. 그의 딸인 경민이는 지금도 한진중공업 곁을 지날 때면 그 절망의 공장을 폭파해버리고 싶다고 한다. 그의 아내인 정갑순은 지금도 길 가다 키 작은 남자만 봐도,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고 한다.


<자본가가 지는 해라면 노동자는 뜨는 해, 노무현>

그런데, 다음에 등장할 사람은 의외의 인물이다. 어쩌면 이 소설 같지 않은 소설에서 가장 행복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도 한때는 이런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과 함께 했다. "자본가가 지는 해라면 노동자는 뜨는 해다"라고 해맑게 말하던 이다. 그래서 전태일 열사 기일 때는 함께 향을 피우기도 했던 이다. 김진숙과는 노동자도 이론이 있어야 세상을 바꾼다며 소모임도 함께 했던 이다. 최루탄 가루가 싸락눈처럼 내린 범냇골 국민운동본부 옥상에서 막걸리를 나눠먹으며 신나하기도 했던 이다.

그런데, 그가 누구냐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김진숙과 김주익의 한때 동지였고, 고문변호사이기도 했던 이다. 짧은 인연이었지만 그도 이들과 함께 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김주익이 85호 크레인에 오르고, 곽재규가 도크 지하로 몸을 던질 때, 공교롭게도 그는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어 있었다.

김진숙의 말을 빌리자면 오히려 ‘그의 시대에 가장 많은 노동자가 잘렸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구속됐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비정규직이 됐고, 그리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죽었다. 군사독재 시절엔 대드는 노동자만 잘렸으나 그의 시대엔 남녀노소가 잘렸다. 서민의 벗이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나 부자와 빈자의 간극은 훨씬 더 까마득해졌다.’

핵폐기장 건설에 반대하는 부안 주민들도 얻어 터졌고, 제국주의 석유전쟁인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시민들도 얻어 터졌다. 새만금 개발에 반대해 생태개발을 외치던 주민들도 얻어 터졌고, 농수산물 시장개방에 반대하는 농민들도 얻어 터졌고, 평택미군기지 이전확장에 반대하는 대추리 주민들도 얻어 터졌다. 한미FTA에 반대하는 국민들도 얻어 터졌다.

김주익과 곽재규 외 배달호, 김동윤, 최복남, 전용철, 홍덕표, 이용석, 이해남, 이현중, 정해진, 하중근, 박수일, 허세욱 등 수많은 노동자 농민 빈민들이 죽어갔지만, 무엇 하나 바뀌지 않았다. 살 길 막힌 수많은 이들이 죽어가며 ‘자살공화국’ 되었고, 부동산 투기공화국이 되었고, 비정규직은 800만을 넘어 섰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약속하며 노동자 민중을 멀리하고,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제안하기도 했다. 87년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열린 절차적 민주주의가 일터와 삶터의 실질적 민주주의로 이행해 나가야 할 역사적 과도기에 그는 수많은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초국적 자본의 이해에 부응하는 일명 ‘좌파 신자유주의자’로서의 노선을 충실하게 밟아갔다.

하지만 그렇게 박창수와 김주익과 곽재규와 김진숙의 곁을 떠났던 그의 생도 행복하지 않았다. 2009년 5월 23일, 그는 역사의 패배자가 되어 혼자 외로이 봉하마을의 부엉이 바위를 망루 삼아 올라야 했다. 그의 죽음은 기실 출구를 잃은 1987년 6월 체제의 죽음이었다.

어디로도 갈 길을 잃고 무상함에 빠져 역사의 미아가 된 그의 유서에는 김주익이 죽음을 통해서라도 지키려 했던 어떤 ‘투쟁의 광장’도, 어떤 사회적 역사적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슬픈 일이었다.

그렇게 한 뿌리에서 시작했던 네 사람의 운명은 길은 달랐지만 끝은 같았다. 무자비한 자본의 질서에 의한 사회적 타살들이라는 점이 같았다. 초국적 자본의 시대에 한 마리 파리 목숨들일 수밖에 없는 역사적 서자들의 운명이 닮았다. 이런 참혹한 자본의 시대를 견딜 수 없었다는 점에서 닮았다.

다만 가해자의 편에 섰었는가, 저항하는 사람들의 편에 섰는가가 달랐을 뿐이다. 먼저 가버린 이들에게 따질 바는 아니겠지만 나는 그래서 노무현이 한 나라의 대통령까지 한 위대한 이였다 하더라도, 그 삶의 가치에서는 김주익과 곽재규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세월이 흘러야겠지만, 조선왕조 시대 어느 왕의 이름보다 민란을 이끈 전봉준과 김개남이 역사에 길이 남는 까닭일 것이다.


<해고는 살인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죽음들을 통과하고 승리한 자는 누구인가. 한진중공업. 그렇다. 삼성그룹. 그렇다. 현대자동차. 그렇다. 쌍용자동차. 그렇다. 대우자판. 그렇다. 콜트콜텍. 그렇다. 발레오공조. 그렇다. 재능교육. 그렇다. 전주버스. 그렇다. 이명박. 그렇다.

현상적으로 본다면 그렇다. 박창수와 김주익과 곽재규의 목숨을 집어 삼킨 한진중공업은 올해에도 마지막 남은 공장 인원의 1/3인 400명을 정리해고하겠다고 나섰다. 십여 년 사이 수만 명에 달하던 노동자들이 800여 명밖에 남지 않고 모두 잘려나갔다. 대부분은 비정규직이 되었다.

이 틈에 공장은 이미 수조원을 들여 필리핀 수빅으로 이전해 두었다. 2010년에만 비정규직 포함 3000여명이 잘렸고, 300명이 강제휴직을 당했고, 울산공장이 폐쇄됐다. 경영이 위기에 처했냐고. 천만의 말씀. 2011년 올해 270여명을 다시 희망퇴직으로 정리하고, 나머지 170여명을 정리해고 통보한 다음날, 대를 이은 조양호와 조남호, 조수호 사주 일가는 176억의 고배당을 챙겨갔다.

한진중공업만 그러냐고? ‘이병철 회장의 아들이 이건희 회장으로 부자 1위가 되고, 또 그 아들 이재용 상무가 부자 2위가 되는 나라. 정주영 회장의 아들이 정몽구 회장이 되고, 또 그 아들 정의선 부회장이 재계순위 4위가 되는’ 나라다.

이미 900만에 이르는 노동자 서민들이 비정규직의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오늘도 ‘사회적 살인’에 다름아닌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 공공부문 사유화 등 자본의 위기를 노동자 민중의 위기로 전가하는 구조조정은 끊이지 않고 있다.


<다시 85호 크레인, 김진숙>

그리곤 2011년 1월 6일. 새벽 3시. 한 여성노동자가 혼자 김주익의 영혼이 아직 내려오지 못하고 있는 85호 크레인의 차가운 난간을 붙잡고 올랐다. 사측이 정리해고 명단을 발표하기 전날이었다. 8년 전 김주익과 곽재규가 죽음으로써 지킨 민주노조와 조합원들의 생존권이 모두 산산조각나고 있는 때였다. 마지막 살아 남은 자. 김진숙이었다.

그는 지난 8년 동안 방에 불을 때지 않고 살았다. 85호 크레인에서 혼자 추위와 외로움에 떨다 죽어간 김주익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왠일인지 지난 1월 5일 저녁, 함께 살던 후배 황이라에게 굳이 밥을 같이 먹자하고, 8년여 동안 가지 않던 목욕탕을 다녀오더라 한다.

이틀 전엔 비로소 8년 동안 불을 때지 않던 방에 보일러를 켰었다고 한다. 그렇게 목욕재계를 하고 밤늦게 나간 그가 새벽에 문자를 보내왔다. ‘놀라지 말고 책상 위 편지를 봐라’라는 문자였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평범치 못한 삶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결단의 순간들이 있었’지만 ‘85호 크레인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기에’, ‘이번 결단을 앞두고 가장 번민했’다고 한다. 도대체 그 번민이 어떤 의미일까.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생각할 수도 없다.

그는 그 의미를 알기 때문에 자신만은 ‘주익씨가 못해 봤던 일, 너무나 하고 싶었으나 끝내 못했던, 내 발로 크레인을 내려가는 일을 꼭 할 겁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 85호 크레인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더 이상 눈물이 아니라, 더 이상 한과 애끓는 슬픔이 아니라 승리와 부활’의 자리가 되도록 ‘아직도 85호 크레인 주위를 맴돌고 있을 주익씨의 영혼을 안고 반드시 살아서 내려가겠’다고 한다.

사람들이 염려하지 않게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던 크레인 위에서 오히려 ‘공기 좋고, 전망 직이고, 젤 좋은 게 뭔지 아십니까? 사람들이 다 알루 보입니다. 방이 좀 작아서 그렇지 발코니도 널찍해요. 봄이 오면 텃밭을 가꿔서 가을에 걷어 먹을 생각’이라고 눙을 친다.

‘아직 수맥 찾는 법을 몰라’, ‘양치질은 짝수 날만’ 하고, ‘세수는 윤석범 동지 장가가는 날은 꼭 한다’라고 한다. ‘35m 크레인 위에서 군고구마 먹어 본 사람’ 있냐고 골린다. 징역살 땐 하루에 4520원 밖에 안쳐주더니, 오늘부터는 하루 손배 100만원짜리 인간이 되었다고, 이제야 제 가치를 인정받는 것 같다고 신나 한다.

올라와 보니 ‘동지들이 많이 모인 날은 삶 쪽으로, 동지들이 안 모이는 날은 죽음 쪽으로 위태롭게 기우뚱거리며’ 129일을 버티던 김주익의 마음이 이해된다고, 김주익을 죽인 건, 어쩌면 나였다고 쓰기도 한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처럼 모두가 개별화되어 서럽게 죽지는 말자고 한다.

‘산 자와 죽은 자는 저들이 갈라놓은 이간질일 뿐’이라고 한다. ‘우린 어제도 하나였고, 오늘도 하나’라고, ‘우리 단결이라는 방탄조끼’를 입고 끝까지 단결해서 꼭 승리하자고 한다.

한진중공업엔 우리들만 다닌 게 아니라고 한다. ‘평생을 새벽밥하며 남편 출근하는 동안에도 한시도 맘놓지 못했던 아내들도 다녔고, 아빠 돌아올 시간만 목 빠지게 기다리다 아빠 얼굴 그리며 잠들던 우리 아이들도 다녔고, 노심초사 아들내미 사위 걱정에 한시도 편할 날 없던 우리 부모님들도’ 다녔던 공장이라고 한다.

도대체 수십년간 ‘일요일 날에도 특근 나가던’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냐고, 우리가 어떻게 경영을 어렵게 했냐고 한다. ‘지 마누라, 지 자식 옆에 있는 시간보다 회사에 있는 시간이 훨씬 길었던 저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회사를 어렵게 만들었’냐고 한다.

자신은 ‘예준이가 두 돌이 되는 것도 이 공장에서 보고, 민석이가 세 돌이 되는 것도 이 공장에서 보고, 유주가 학교에 들어가는 것도, 다림이가 중학생이 되는 것도, 현서가 건강하게 잘 자라는 것도 이 공장에서’ 지켜볼 거라며 우리 모두 함께 싸우자고 한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다. 나는 이렇게 처참하면서도 아름다운 문학을 본 적이 없다.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 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세기를 넘어, 지역을 넘어, 업종을 넘어, 자자손손 대물림하는 자본의 연대는 이렇게 강고한데, 우린 얼마나 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연대는 얼마나 강고합니까?

비정규직을, 장애인을, 농민을, 여성을 외면한 채 우린 자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소름 끼치고, 아무리 치가 떨려도 우린 단 하루도 그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저들이 옳아서 이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연대하지 않음으로 깨지는 겁니다. 맨날 우리만 죽고, 맨날 우리만 패배하는 겁니다.

아무리 통곡을 하고 몸부림을 쳐도 그들의 손아귀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억장 무너지는 분노를,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이 억울함을 언젠가는 갚아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버이날 요구르트 병에 카네이션을 꽂아놓고 아빠를 기다린 용찬이. 아빠 얼굴을 그려보며 일자리 구해줄테니 사랑하는 아빠 빨리 오라던 혜민이. 그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좀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이런 시대의 절규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이렇게 아름답고 존엄한 인간의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그는 지금 한진중공업 동료 노동자들과 그 가족만을 위해 싸우고 있지 않다. 이 서러운 이야기는 우리 시대 평범한 모든 이들이 함께 살아 온 한 시대에 대한 이야기다. 지금 여기서 살아가고 있는 모두의 운명과 관련된 이야기다.

난 여기에서 굳이 그런 김진숙을 ‘소영웅주의’네, ‘절차와 지침’을 따르지 않고 조직을 와해시키는 비조직적 행동이네 하며 깠다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까닭은 못 느낀다. 자발적으로 조합원들이 친 천막을 철거하고, ‘사측의 협조를 얻어 회사 CCTV를 분석해’ 누가 김진숙이 오르는 것을 도왔는지를 조사하며, 촛불문화제의 음향 제공까지를 거부하며 크레인 농성 초기 김진숙을 비난했다는 한진중공업 노조 지도부를 이야기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후 단결해 지금 다시 47m 높이의 제2안벽 크레인 위로 올라간 금속노조 부산양산 지부장 문철상과 한진중공업 지회장 채길용을 생각하고, 근처 거제도에서 다시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15KW의 전류가 흐르는 송전탑엘 ‘신나’를 들고 올랐다는 김진숙의 또 다른 벗 강병재에 대해서만 얘기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14명의 동료를 잃고 오늘도 거리를 헤매고 있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과, 그 추모제가 열리는 날 재능교육 본사 앞에서 삭발을 하고 단식을 선포했다는 재능교육 비정규직 유명자와 그 동료들의 이야기도 뼈아프지만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대법원 판결에 따른 정규직화 요구를 하다 도리어 구속되고 해고되고 징계당하며 울산 현대차 공장 앞에서 오늘도 끌려가고 있다는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비정규직들의 얘기를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대와 고대와 연대에서 농성 중인 청소용역 노동자들을, 프랑스 대사관 앞에서 벌써 몇 달째 노숙을 하고 있는 발레오공조코리아 노동자들을, 또 그렇게 몇 년째 싸우고 있는 국민체육진흥공단의 비정규직들을, 이제 다시 거리로 나앉게 된 대우자판 노동자들을, 다시 망루를 쌓고 올랐다는 전주버스 노동자들을, 5년째 위장폐업한 공장을 지키며 뜨개질로 하루를 보내며, 기금 마련을 위한 CMS 신청서를 만들었다고, 한번 봐달라고 보낸 콜트-콜텍 기타 만들던 노동자들을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럴 때 민주노총이 나서서, 금속산별이 나서서, 삼성에서, 쌍용자동차에서, 그리고 다시 어디에서 죽어가고 있는 노동자들에 대한 범국민적 저항에 나서야 한다고, 날마다 청와대와 전경련과 경총으로 진격하는 투쟁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의 한 주인공이기도 했던 노무현의 계승자들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박창수, 곽재규, 김주익의 벗인 김진숙이 다시 ‘85호 크레인’에 오르듯, 신자유주의라는 야만의 행진을 멈추게 할 부엉이 바위에 결단코 오르는 일이라는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립서비스가 아니라 진정한 민주대연합을 바란다면 이제 다시는 김주익과 곽재규를 등 떠밀지 않고, 시대에 참회하며, 지금 당장 구원이 필요한 그들에게 달려가 ‘이기지 못하면 살아 돌아가지 않겠다’던 김주익의 결의만한 진정성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 시대 모두의 운명과 관계된 이야기다. 저 아래쪽 바닷가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멀어 보이는 일이 아니다. 언제 당신과 내가 다시 이 소설의 주인공이 될지 모른다. 함께 나서 저 여린 소금꽃나무 김진숙이 김주익의 슬픈 영혼을 고이 안고 저 85호 크레인에서 내려올 수 있도록 하자.

우리 시대가 고통받는 모든 이웃들을 함께 껴안고 조금은 더 안전하고, 평화롭고, 평등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자. 그러기 위해 한 발짝만 더 우리 자신의 미래를 위해, 지금 힘이 필요한 그들에게 함께 달려가자.


<송경동시인 글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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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자는jpg김진숙동지.JPG

등록자제5대집행부

등록일2011-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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