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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위대함】- 동일방직 똥물사건과 김진숙동지 <펌>

제5대집행부|2011-02-22|조회 7,587
【평범한 위대함】- 동일방직 똥물사건과 김진숙동지 <펌>


박준성 선생님이 쓰신 '슬라이드로 보는 노동운동사' (전국금속노동조합 간)는 초저녁 에 떼셨겠지요. 책을 읽노라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박준성 선생님 특유의 말투로 느릿느릿 강의하시는 앞에 앉아서 허벅지 꼬집어가며 귀를 세우는 느낌이 들지요. 강의가 지루해서 그런 게 아니라 선배도 알다시피 내가 원래 잠이 많잖아요. 어제 봉고차 기장님이 한 마디 하십디다.  "당신은 잠 자기 위해 촬영 다니는 거 같다"고 말입니다.


어쨌건 이 책에 등장하는 사건과 인물들이 꾸려 가는 역사의 실타래 속에서, 우리는 몰랐던 사실은 아프게 만나고, 뻔히 알던 일이라 해도 마치 딴 사람처럼 치장하고 나온 동료를 대하듯 얼떨떨한 새로움에 젖게 됩니다.  그리고 달이 가고 해가 가고 세기가 가도 '그날이 다시 오면' 엷어질지언정 지워지지 않는 느낌의 지배를 받게 되죠.  아래 사진으로 역사에 남은 사건과 사람들처럼 말이에요.


1978년 2월 21일. 그러니까 33년 전의 오늘 새벽 동일방직 똥물 사건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호프 박준성 선생님의 강의를 빌려 와  보지요.


"1972년 전국 섬유노조 동일방직 지부 조합원은 1천383명이었다. 그 가운데 1천204명이 여성이었다. 그런데도 조합 간부는 회사 말 잘 듣는 기술직 남자들이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부녀부장이던 주길자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민주적인 여성 지부장으로 선출되었다. 사건이었다. 노동조합은 자주적이고 민주적으로 바뀌어 갔다."


여자들에 비해 남자의 못남이 극적으로 대비되는 역사라면 온 인류사를 통틀어 우리 나라가 첫째 아니면 둘째, 때려 죽여도 셋째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을 겁니다. 멀리는 화냥년의 아이러니가 그랬고, 요즘 툭하면 등장하는 XX녀에 대한 광적인 돌팔매질이 그렇죠동일방직의 남성 노동자들 역시 단군의 자손인데다가 그 가운데 특출하게 찌질한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뭣도 안달린' 여자들한테 밀린 것이 싸나이 명예에 똥칠이라도 했다고 봤던지, 그들은 회사와 아삼육의 콤비를 이루며 눈에 불을 켜고 노조 파괴 공작에 나섰습니다. 마침내 1978년 2월 21일. 노조 대의원 선거가 있던 날의 새벽이 밝았습니다. 


투표를 하러 사무실에 모여 들던 여성 노동자들 앞에 버티고 선 것은 회사 측에 매수된 남자조합원 행동대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죽 장갑을 끼고 뭔가를 움켜쥐고 있었죠.그건 똥물이었습니다. 이 똥물에 튀겨 죽일 찌질한 남자 XX들은 똥물을 뿌릴 뿐만 아니라 옷 속에 집어넣고  입을 벌리고 쏟아붓기도 했습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큰 모욕이 벌어지는 동안 "한국노총 섬유노조 조직국장은 조직 선동대로 와 있었고, 경찰 둘은 구경만" 하고 있었다지요. "가난하게 살았지만 똥을 먹고는 살 수 없다."는 울부짖음은 아랑곳없이 유신 정권은 동일방직 노동조합을 박살내겠다는 심사를 여지없이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사진 속의 여공의 표정을 다시 봅니다. 여덟 팔자로 다물린 입은 금새라도 흐느낌으로 미어터질 것 같고, 똑바로 앞을 응시하지 않는 눈은 부끄러움과 분노가 범벅이 된 빛을 쏘아 냅니다. 부르쥔 주먹이 덜덜 떨리고 있음은 누가 봐도 짐작할 수 있겠죠. 저들의 푸른 작업복에 뭉터기로 박힌 저 똥물들은 1978년 대한민국 역사에 들이부어진 오물로서 오늘도 싯누렇게 빛납니다. 입에 똥물을 머금고 양치질을 하는 듯한 욕지기로 양심을 건드립니다. 


책을 읽었으니 아시겠지만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동일방직 근처 사진관 주인 이기복씨였습니다. 이 사진관은 원래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단골로서 '영원한 추억과 우정'을 남기기 위해 즐겨 찾던 곳이었습니다. 상상도 못할 일이 동료 남성 노동자의 손에 자행되고, 그 꼬라지를 경찰은 빙글빙글 웃으며 보고만 있고, 노동자들의 조직이라는 노총 간부는 되레 똥물 튀기기를 독려하고, 입 안에 똥이 처넣어져 악도 쓰지 못하던 여성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카메라 앞에 들이대고자 했을 때 생각나는 사람은 그 사진관의 주인 아저씨 뿐이었습니다. 울면서 자신을 찾는 여성 노동자들의 부름에 이기복씨는 달려 왔고,  셔터를 눌렀습니다.

    
하지만 이미 '지역 차원이 아닌 중앙 차원에서' 동일방직 노조 박살을 기획, 연출하고 있던 중앙정보부와 그외 파쇼의 똥개들이 똥물 냄새에 둔감할 리 없어서 이기복씨의 사진관은 살기등등한 기관원들의 방문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기복씨는 끝까지 필름이 없으며 "노조원들이 가져갔다."고 잡아떼어 여성 노동자들의 피눈물로 현상한 사진을 지켜 냅니다.


"10여명의 여공들이 똥물을 뒤집어쓰고 있었고 노조사무실과 사무장실 천장과 벽에 온통 똥물이 묻어 있었습니다. 또 몇몇의 여공들은 바닥에 누워 울고 있었습니다." 
 

이기복 사장님의 회고입니다. 얼마나 참담한 광경이었을지는 미루어 짐작이 갑니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데모 한 번 나가지 않는 처지의 누구라도 발을 구르며 분노했을 겁니다. 평범한 사람 그 누구라도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에게 칼끝이 향했을 때 그 분노를 숨김없이 드러내기란, 작은 행동이나마 발 내딛어 그 분노를 100분의 1이라도 표출해 보기란 힘들다는 걸 평범한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지요. 


선배. 저는 오늘 저 사진을 다시 보면서 동일방직 노동자 뿐만 아니라 이기복씨가 궁금해졌습니다. 78년이라면 긴급조치가 시퍼렇가 못해 눈흰자위처럼 허연 빛으로 세상을 쓸어볼 때, 평범한 동네 사진관 아저씨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이 사진을 지켜낸 것일까. 21세기 G20의 하나라는 대한민국에 살면서도 누군가 내 앞에 나타나 "경찰입니다." 하며 독수리 신분증을 펼쳐 보인다면 흠칫 하면서 무슨 일이시죠? 예의 바르게 물어 볼 것 같은데, 하물며 날아가는 새를 떨어뜨리는 정도가 아니라 날으는 기러기 떼 꼬치구이를 하래도 할 수 있었을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들이닥쳐서 사진 있는 거 다 아니까 내놓으라고 책상을 두들길 때 그는 무슨 용기로 "사진 없습니다. 다 가져갔습니다." 하고 시치미를 뗄 수 있었을까. 행여나 숨겨뒀던 필름이 발각이라도 됐다면 몇 년쯤은 우습게 감옥에서 썩을지 모르는 상황인데 말입니다.

 
이기복씨도 덜덜 떨었을 겁니다. 그냥 의리고 뭐고 확 다 집어치우고  슬며시 사진 내 주며 "나야 뭐 돈 주고 찍으래서 찍은 거 뿐입니다." 하고 겸연쩍게 말하며 머리를 긁고 싶었을지도 모르구요.  나아가 "쟤들은 진짜 빨갱이들이었다니." 하면서 스스로를 위무하고 망각의 저편으로 양심의 고리를 넘겨 버리고 싶은 유혹에 휩싸였을 가능성도 큽니다. 하지만 '여공'들의 '추억'을 만들어 주고 김치와 치즈를 연발하며 웃음을 끌어내던 평범한 사진관 주인은 그 공포와 유혹을 넘어섰고 그는 우리 역사에 보기 드문 기록을 후세와 후손들에게 전해 주게 됐습니다. 때론 백 권의 책보다 한 장의 사진이 더 설득력이 큰 법.  그가 없었다면 동일방직 똥물 사건은 건조한 문자와 억울한 육성으로만 남았을지도 모르잖아요.  


반드시 기깔나는 업적을 남기고 불세출의 위업을 이룩해야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본때나는 '큰 자리'에 오르는 '인물'들이어야만 역사를 만드는 것은 아닐 겁니다. 이기복씨같이 평범한 사람, 장삼이사에 필부필녀의 한 사람 뿐일지라도, 나나 선배나, 그 외 우리가 술 먹고 어울리는 친구들일지라도 우리 앞에 닥쳐든 역사에 무심하지 않으면, 그 공포에 저항하지는 못할망정 항복하지는 않으면, 유혹에 빠질망정 정신을 잃지는 않으면, 저 사진처럼 모래처럼 작지만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역사의 알갱이들을 창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봐요.  


나찌의 마수에서 유대인들을 구해 낸 오스카 쉰들러는 사실 휴머니즘과는 거리가 매우 멀고, 비열한 돈 거래에는 도가 텄던 비정하기까지 한 사업가였다지요.  그런데 그는 자신의 위태로움을 무릅써 가며 유태인들을 구했습니다. 그의 손에 생명을 구했던 한 유태인이 그에게 그 까닭을 물은 적이 있다고 해요. 그러자 그는 아무 거리낌없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건 당연하지. 그 사람들은 내가 아는 사람들이었거든.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들한테는 인간적으로 대해 줘야 하는 거라고."


선배. 저는 그 대답이 언뜻 싱거워 보였지만 그렇지 않음을 깨닫게 됐어요.  그건 쉰들러가 선택한 마지막 양심의 보루였던 겁니다. 나찌에 저항하고 히틀러 개XX를 부르짖는 것은 언감생심이고 나는 그 와중에 돈도 벌어야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아는 사람들만큼은 그렇게 참혹하게 죽어가도록 놔 둘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의 성곽이었고 그는 그 성곽을 지켜낸 겁니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이 일궈낸, 지성적이지도 않고 특출나게 용감하지도 않은 한 무뚝뚝한 독일 남자가 빚어낸 인간의 위대함이었던 거지요.  


이기복씨가 '목숨을 걸고' (이건 제 표현입니다.  하지만 그때 그분은 나름 그러셨을 거예요.) 찍어낸 사진 앞에서 지극히 평범하고 내 앞가림에 정신없는 삶을 살아가는 저로서,  뭔가는 해야 할 것 같다는 강박에 시달리던 차에 그저께 박준성 선생님께 약속했던 김진숙 위원 관련 광고 모금이 퍼뜩 떠올라서 입금을 하러 갑니다. 이거나 먹으라고 똥물을 입에 부어 버리던 시대는 지나갔지만 수백명 노동자들을 눈 깜짝 하지 않고 해고하고 너희들 갈 길 가라는 시대는 엄존하지요. 그에 대해 항의하며 수십일 크레인 위에서 버티는 분은 날이 갈수록 외로워지고 있다면, 동일방직 똥물 사건 때 팔짱 끼고 그 꼴을 지켜보던 경찰과 나와의 거리가 얼마나 멀까를 자문할 때 저는 소스라치게 됩니다.  선배한테도 좀 부끄러워지기도 하구요. 이기복씨는 못될지언정 팔짱 낀 아무개가 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제 블로그와 트위터와 페이스북, 그 외 모든 제 손길이 미치는 영역에 이 글을 올립니다.  아울러 박준성 선생님의 호소를 덧붙입니다. 1978년의 오늘 새벽을 그 역하게 코를 찌르는 냄새를 기억 아닌 기억을 하면서 말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위대해 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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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진숙 씨의 싸움을,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거친 투쟁을 많은 사람의 목소리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신문광고를 냅시다.

‘소금꽃 나무’를 쓴 여성 용접공 김진숙 씨가 35미터 크레인에 오른 지 40일이 넘었습니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를 막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사이 두 명의 노동자가 똑같은 이유로 옆 크레인에 올랐고, 회사는 문을 닫고 172명 정리해고를 통보했습니다. 이제 회사에게 남은 카드는 공권력 투입. 아마도 우리와 사회의 관심이 바닥에 가까워지는 순간, 회사는 거리낌 없이 경찰을 불러들일 지도 모릅니다. 이 정권에게 그런 일쯤은 쉬운 일이니까요.96년만의 한파가 몰려왔다고 합니다. 꼭 차가워진 바람 탓을 들지 않더라도, 추워도 이리 추울 수가 없습니다. 보일러 꺼진 방에 혼자 앉아 있어도 두꺼운 겨울 이불이 무색할 정도로 을씨년스럽기가 그지없는데, 35미터 하늘 속 작은 조종실에서 혼자 싸우는 이들의 마음은 또 어떻겠습니까. 외롭게 싸워 본 사람들은, 그 외로움의 위력을 잘 압니다. 말 섞을 이도 없는 고공 크레인에 위탁한 채 정리해고에 맞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그냥 그대로 두실 겁니까.


김진숙 씨는 “크레인에 오른 지 몇일 인지를 100명만 기억해도 이 싸움을 이기지 않을까” 했습니다. “조종실이 떨어져 박살나는 꿈을 꾼 뒤로 날짜를 세기 시작했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나 때문에 이 싸움을 기억하는 사람이 100명에 이르지 못하는 것도 싫고, 김진숙 씨가 꾼 끔찍한 꿈이 공권력의 손으로 일어난 뒤에 후회하기는 더더욱 싫습니다. 그냥 두지 맙시다.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따로 주도하는 사람이 없어도, 이름 있는 명망가가 없어도, 대표하는 사람이 없어도 좋습니다. 김진숙 씨의 싸움을,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거친 투쟁을 많은 사람의 목소리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신문 광고를 냅시다. 그리고 광고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기 일하는 곳에서 한진중공업 투쟁이 승리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탭시다. 신문광고가 ‘목적’이 아니라 ‘시작’이 될 수 있도록 해봅시다. 그렇게 이 연대를 이심전심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계속 이어갑시다.

2011. 2. ○○○


<딴지일보 산하님 글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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