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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소식

KBS 고민정 아나운서 인터뷰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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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아팠다. 뒤늦게서야 알게 된 故 최고은 작가의 죽음. 고인의 얼굴 위로 남편의 얼굴이 겹쳐졌다. 한 개인이지만 슬픔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에 트위터에 글을 올렸다. 감정이 사그라들기 전에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다. 최고은 작가의 죽음.. 마치 결혼 전 옥탑방에 살던, 지금은 내 동반자가 된 이 사람이 눈을 감은 것만 같아 자꾸 가슴이 아파온다.

"고민정(33) KBS 아나운서는 남편을 '오빠'라고 불렀다. 결혼한지 벌써 5년이나 됐는데도 여전히 '오빠'다.

고민정 아나운서가 최고은 작가의 죽음에 남편을 떠올린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故 최고은 작가, 남편, 옥탑방, 그리고…

고민정 아나운서의 남편 조기영(44) 시인은 결혼 전 옥탑방에 살았다. 2000년, '오빠'가 낸 시집 <사람은 가고 사랑은 남는다>를 보던 그녀는 깜짝 놀랐다.

"거기 보면 바닥 난 쌀독에 쌀 몇알, 혹은 지갑을 열어보니 천원짜리 두 장이 달랑 들어있고… 이런 얘기, 먼 거리를 몇 백원을 아끼기 위해 걸어갔다는 얘기를 시를 통해서 알았어요. 그때까지는 전혀 몰랐어요.

"몇 백원이 부족해서 걸어다녀야 하는 삶을 상상조차 못해봤던 그녀는 충격을 받았다. '얼마나 걸었냐'고 물었더니 '세 시간을 걸었다'고 했다. 한참동안 펑펑 울었다. 너무 슬펐다.

"항상 그 사람은 뭐랄까, 돈의 부족함 때문에 겪는 어려움이나 슬픔을 나한테는 전혀 내비치지 않았어요. 둘이 만나면 당연히 맛있는 국밥집 가서 국밥 먹고, 우리는 차가 없으니까 전철이나 버스 타고 다녔기 때문에. '왜 우리는 좋은 레스토랑에서 안먹고, 고급승용차를 몰고 다니지 않을까'라는 생각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어요. 애인을 만나서 국밥 한그릇이라도 사주려면 몇 천 원이 드니까 차비를 아꼈나 보더라고요.

"다음날,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나서 다시 물었다. 왜 이런 얘기를 안했는지. 그런데 '오빠'는 슬프지 않다고 말했다. 세 시간 걸어서 다리는 아프지만 운동도 되고 걷는 동안 수많은 시상들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최고은 작가가 숨졌다는 소식을 접한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이 일이 떠올랐다. 어쩌면 최고은 작가도 그런 삶을 살지 않았을까. 퇴근하고 집앞에 도착한 뒤 차 안에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그때 트위터에 글을 썼어요. 추운 겨울밤에 차안에서 두 손이 꽁꽁 얼어가면서 썼죠. 그분이 돌아가신 이 시점에 한 개인이지만 슬픔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었어요. 살아있을 때 나눴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당신의 죽음이 헛된 것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거북이 '터틀맨' 임성훈씨가 죽었을 때도,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이진원씨가 죽었을 때도 세상은 한동안 시끌벅적했지만 며칠이 지나면 언제 그런일이 있었냐는 듯 사람들은 그들을 잊어버렸다. 그렇게 제2, 제3의 최고은이 양산된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제가 기자가 아니기 때문에 심층취재를 할 수는 없지만, 저도 한사람의 민중, 시민으로서 그러한 작가들의 삶이 있었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세상은 한사람의 위대한 지도자로 인해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여러사람들의 힘과 목소리가 모이는게 세상을 바꾸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해요. 작가들이 열심히 일을 할 수 있는 시스템과 제도도 필요하지만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우리들이 좀더 다른 시각으로 바라봐야 되지 않을까요? 작가들이, 예술가들이 한 명씩 죽어가는 이런 현실을 제3자 입장에서 슬퍼할 것만 아니라 내 옆에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까, 내 옆에 있는 누군가가 지금은 정말 가능성이 없어보이더라도, 예술을 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면 그 작품의 가치가 어찌됐든 일단 응원했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월든(Walden)>을 쓴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를 예로 들면서 자신의 생각을 이어갔다.

"제가 진행하는 '책 읽는 밤'에서 고전을 조명하는데 그 작가들을 보면 당시에는 괄시를 받았던 작가들이에요. 얼마전 소로우의 '월든'을 했는데 그 작가도 일거리 없이 일용직을 하면서 살았던 분이에요. 당시에 '월든'이라는 책은 저평가 받았고, 100년이 지나서야 책의 진가를 발견한 거죠. 옆에 있는 친구가 그림이나 음악, 미술을 했을 때 지금은 몰라도 100년 뒤에는 '월든' 같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는 거예요."


민중가요 같은 사람

그녀는 네티즌 사이에서 '개념 아나운서'로 통한다. 진솔하게 드러내는 그녀의 생각은 따뜻한 기운을 담고 있다. 세상과 사람을 향한 진지하고 따뜻한 시선은 대학시절 만들어졌다.

대학시절 그녀는 단과대학 민중가요 노래패 '작은연못'에서 활동했다. 그녀가 '작은연못'에 가입하려고 하자 학과 선배들이 다들 말렸다. '작은연못'이 이른바 '운동권 동아리'라는 게 이유였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교과서에 나오는 얘기들만 보고 살았어요. 뉴스도 안보고. 우리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없었어요. 민중가요 노래패에 있다보니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어요."

'작은연못' 사람들이 참 좋았다고 했다. 다른 데에서는 으레 남자 선배들이 여자 후배들에게 밥이라도 한끼 사주려고 하는게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게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선배들 밥을 살 때도 꽤 있었다. 선배들은 운동도 강요하지 않았다. '네가 직접 겪어보고 선택해라'라고 말했다.

"그게 자신감으로 비쳐졌어요. 교과서에서 읽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역사도 알게 됐어요. 항상 대중가요들에서 나오는 게 사랑 아니면 이별인데, 사랑을 안해 본 사람들은 대중가요의 노랫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잖아요. 우리의 삶은 여러가지로 표현될 수 있는 건데 민중가요에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어요.

"그녀는 '작은연못' 회장이 된 뒤에는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네'하는 가사가, 등록금 투쟁 할 때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 '꽂혔다'고 했다.

동아리 생활을 하면서 졸업을 하면 무엇을 할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됐다. 이 사회에 용기를 줄 수 있고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는 생각이었다.

"민중가요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무조건 '당신이 노력하면 될 수 있어'라고 얘기하지 않고 삶의 진솔한 얘기를 배웠던 것처럼, 인간 자체로 사람들에게 희망이, 용기가, 위안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4학년이 됐을 때, '오빠'가 뭘 하고 싶냐고 묻더니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추천해줬다. 그런데, 그게 고민이 됐다. 주변에는 아나운서는 물론이고 기자나 PD도 없었다. 웬지 아나운서는 연예인 같고 화려한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이 희망이 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오빠' 생각은 단단해 보였다.

"오빠는 직장인으로서 희망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나는 몰라도 나를 알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것들을 전해줄 수 있지 않겠냐고 하더라고요. 그동안 아나운서는 방송에 나와서 원고를 소화하는 사람, 화려한 연예인같은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나는 몸이 하나이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은 한정돼 있지만 아나운서를 하게 된다면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고, 올바르게 내가 살아간다면 누군가는 나의 삶을 따라올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아나운서를 공부했어요."

4학년 2학기 때부터 아나운서 공부를 시작했다. 주변의 반응은 썰렁했다. 심지어 '작은연못' 선배들조차도 '네가 아나운서를 하면 잘 할 거야'하는 말 한마디 해주지 않았다. 아나운서를 하겠다고 하면 "야, 네가 무슨 아나운서야"라는 말이 돌아올 뿐. '너는 할 수 있어'라며 격려해준 유일한 사람이 '오빠'였다. 그 말에 용기를 냈다. 힘들 때마다 일부러 '오빠'의 격려를 들으면서 힘을 냈다. 그렇게 '빡세게' 공부한 끝에 1년 뒤인 2003년 10월, KBS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했다.

"누구는 고등학교 때부터 준비해왔는데도 안됐는데, 너는 4학년 2학기 때부터 1년 준비해서 된 거면 진짜 복 받은 거다, 운이 좋은 거다, 어디 가서 그런 얘기 하지 말아라고 하는데, 제가 아나운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대학 4~5년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민중가요 노래패 생활을 했던 시절은 단순히 그냥 대학생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정말 지성인으로서의 삶이었던 것 같아요. 선배들하고도 많이 싸웠어요. 고민할 꺼리가 많잖아요. 부모님이 등록금 주시는데 왜 굳이 안해도 되는 등록금 투쟁하면서 싸워야 되며, 나는 노동자도 아닌데 왜 노동자들과 함께 싸워야 되는지…. 많이 싸우고 많이 물어봤어요. 그런 과정이 제 가치관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였어요. 단순히 나 혼자 잘해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 결론이었어요. 4년간의 '숙성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1년 공부해서 아나운서가 된 거예요."

아나운서가 된 뒤 그녀가 정한 원칙이 있다.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가령 자신이 닭발을 좋아하는데 원고에 '닭발을 어떻게 먹어요?'라는 '내숭멘트'가 있을 때는 아예 그 멘트를 하지 않는 식이다. 그런 노력이 전해졌을까. 그녀가 방송에서 한 말들에 공감을 하고 힘을 내라고 위로해주고 격려해주는 청취자들이 늘어났다. 그런 청취자들을 만날 때마다 '지금까지 잘해왔구나'하는 생각에 보람을 느낀다.


중국에서 만난 '오드리 햅번'

아나운서로서는 한창 잘나가던 2009년, 그녀는 갑작스레 휴직을 하고 1년간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6년차 아나운서는 왜 중국으로 떠났을까.

"아나운서들은 패턴이 좀 빨라요. 다른 직업들은 모르겠지만 7년차 되면 정말 중견이에요. 3~4년차까지는 일단 모든 방송 프로그램에 MC후보로 올라가지만 7년차가 되면 그 후보조차 못 올라요. 내 색깔을 확실히 갖고 있지 못하면 내 방송을 갖지 못하는 거죠. 제가 당시에 '무한지대 큐'도 하고 '밤을 잊은 그대에게'도 하고 있었는데 둘다 아나운서들이 하고 싶어하는 프로그램이었어요. 좋은 프로그램 하는데 왜 가느냐고 다들 그러더라고요. 나는 '무한지대 큐'를 하기 위해 아나운서를 하려고 한게 아니었는데, 그냥 머물러 있으면 그 프로그램에 갇혀버릴 것 같더라고요. 어느순간 카메라를 보면서 똑같은 말을 읊어대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게 없었어요. 호주머니에 비밀무기들이 없는 느낌이었어요. '지금이야말로 내 호주머니를 채워야 할 시점이구나. 기왕이면 뭔가 버릴 수 있을 때 가자' 그런거죠. 정말 소중한 것들을 버릴 수 있어야 그게 얼마나 소중한 지 느낄 수 있고, 더 소중한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에서 떠났어요. 그래서 서둘렀죠."

중국으로 떠나기전 그녀는 한국에서의 '흔적'을 모두 지웠다. 집과 차를 팔고 신문대금을 정리하고…. 모든걸 정리하는 데에만 한 달의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라는 한 사람을 옭아맸던 것이 너무나 많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모든 걸 정리한 뒤 중국으로 갔을 때는 정말 홀가분했다고 했다.

"내가 이렇게 어렵게 결심했으니 큰 걸 얻어오지 않으면 안된다는 마음으로 죽기살기로 일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해서 많은 것들을 버렸어요. 책에 보면 버리면 버릴수록 채울 수 있다는 말들이 많은데 진짜 그렇게 해보니까 그렇더라고요. 옛 성현들이나 어른들의 말이 괜히 그렇게 나온게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했어요."

중국에서도 따로 집을 얻지 않고 대학 내에 있는 기숙사에서 부부가 함께 지냈다. 부엌도 없는 작은 공간이었다. '어떻게 음식을 해먹을까' 고민이 들 정도였다.

"예전에 오빠가 옥탑방에 살 때 '우리가 결혼하면 이런 옥탑방에서 살면 어떨까'라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때는 진심으로 이런 곳에서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좁은 공간에서 두 사람이 많은 걸 나눌 수 있고, 문을 열면 하늘도 가깝고. 결혼하자마자 20평 정도 되는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그때는 그게 큰 건지도 몰랐어요. 중국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방 2개, 부엌, 화장실이 있는 집에서 사니까 왜 그렇게 소중하고 넓어보이는지 모르겠어요. 만일 중국에 가지 않았다면 더 큰 집, 더 좋은 집 욕심을 내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중국에서 부부가 함께 오지로 여행을 다녀왔다. 좀더 내밀한 곳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가기 힘든 곳에 배낭을 둘러메고 한 달을 여행했다. 여행을 하면서 하루에 2~3백원을 벌기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많고 집 대신 천막을 세워놓고 사는 사람들도 많다는 걸 직접 보게 됐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서울 도심에서 걸어다니는 셀러리맨들보다 훨씬 여유있고 넉넉해보였다. '아, 내가 물질을 갖고 있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구나'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함께 여행을 다니니 동반자에 대한 소중함도 더욱 커졌다.

중국에서 공부만 하기에는 시간이 아까웠던 그녀는 교수에게 중국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졸랐다. 자신이 가진 재능을 쓰고 싶었다. 거기서도 교훈들을 얻었다.

"라오스를 여행했을 때 라마승을 만났는데 그 분이 한국어를 공부하더라고요. 그분과의 만남도 그렇고, 내가 한국어로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중국에 다녀오고 나서는 '내가 한국어를 외국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구나'하는 걸 알게 됐죠."

그에게 '힌트'를 준 건 유명한 영화배우 오드리 햅번이었다. 우연히 오드리 햅번이 죽기전에 아들에게 남긴 글을 접하고서는 한동안 멍해졌다.

'… 만약 도움의 손이 필요하다면 네 손을 이용하면 된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걸 깨닫게 된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오드리 햅번이 암투병 중에 소말리아를 방문했던 당시 했던 인터뷰도 보게 됐다.

"오드리 햅번이 돌아가시기 5~6개월전이었어요. '수많은 플래시들이 나에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이 아이들에게 비치길 바라기 때문에 이곳에 왔다'고 했어요. 그분 인터뷰를 보고 나니까 나를 향해 쏟아지는 수많은 화려한 플래시들을 이용해서 더 좋은 곳에 나눌 수 있는 위치에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외국인노동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앞으로의 나의 계획이에요. 외국인노동자들이나 한국어를 배우고 싶지만 돈이 없는, 정말 필요로 하는 곳에 나의 재능을 나눴으면 좋겠어요."


여인이 되어 돌아오다

2010년, 유학생활을 마치고 중국에서 돌아오니 KBS 상황은 복잡했다.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사장은 '정권이 언론장악을 하려한다'는 비난에 직면했고, 구노조에 반발해 새노조가 생겼다. 새노조는 파업중이었다.

"돌아오자 마자 새노조에 가입했어요. 7월 중순에 한국에 들어왔고 8월1일 복직이었는데 KBS가 한달 내내 파업하고 있더라고요. 나는 회사 상황이 좋아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최악의 상황이었어요. 구노조를 탈퇴하고 새노조를 가입해야 하는데 몰래 할 수도 없고 만천하에 공개해야 되는 상황이었어요. 새노조 구성원들을 보면 PD들은 많아요. 라디오 PD는 90%, TV PD도 다수가 있는데, 아나운서는 소수였어요. 100명중에 17명밖에 없었고, 내가 18번째였죠. 단순해요. 구노조의 여러가지 행태들이 옳지 않다고 스스로 판단했기 때문에, 물론 새노조 안에서도 여러가지 안좋은 모습들이 있으리라 생각해요. 하지만 내가 같이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었고, 그 조직이라면 내가 생각하는 KBS의 방향에 부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복직도 전에 가입한 거죠.

"안타깝게도 당시 파업에 참여했던 아나운서들은 모두 징계를 받았다. 그런데, 복직하기 전이었던 그녀는 징계대상에서 빠졌다. 그 일이 아직도 마음에 걸린다.

"미안함이 있어요. 80년대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부채의식이 있다고 하잖아요. 제가 딱 그런 마음이었어요. 선배들은 그런 마음을 갖지 말라고 하지만 제 마음에서는 한 명이라도 힘을 실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있어요.

"그녀의 꿈은 원래 십년 뒤에 지방에 내려가서 '조화로운 삶'을 쓴 스콧 니어링 부부처럼 살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단정짓지는 않기로 했다. 중국에서 다닌 여행의 경험이 교훈이 됐다.

"수많은 계획을 세웠죠. 첫날은 뭐하고 둘째날은 뭐하고…. 그런데, 그렇게 안되더라고요. 차가 늦게 오기도 하고, 거짓말에 속기도 하고 그러면서. 인생도 계획한 대로 다 되는게 아니구나, 내가 그 계획에 맞춰 살려고 아둥바둥하지 않았나, 물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는 것도 좋지 않을까, 1년 정도의 계획은 세우되 이후는 여지를 남겨두고 살기로 했어요.

"그녀는 유학을 마치고 "가기 전에는 그냥 KBS 고민정 아나운서였다면, 갔다온 뒤에 여인이 된 것 같다"고 했다. 그만큼 성장했다는 뜻이리라.

어느덧, 아나운서 8년차. 처음 아나운서가 되려고 했을 때 가졌던 목표는 이뤘을까? 아나운서로서의 생활에는 만족하고 있을까?

"답부터 말하자면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아요. 나혼자 고민하고 나혼자 길을 만든다고 만족감을 얻을 수는 없어요. 사람들이 반응을 해주고 내 길이 옳다고 해줘야 결실이 되고 만족감이 되는 건데,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고 격려해주고 제가 글을 올렸을 때 반응해주는 걸 보면 아나운서를 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은 두려움도 들어요. 내 뒤를 좇는 이들이 생기니까. 앞으로는 더 신중하게 가야겠다는 부담감도 있어요."

마지막으로 물었다."남편하고는 잘 지내요?" "그럼요." 활짝 웃는데 쏟아지는 깨 속에 파묻힐 것 같았다.

<<민중의 소리 기사 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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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제5대집행부

등록일2011-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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